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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it Maestro Story _ 명인(名人) 장성필

"50년 가까이 하였지만 나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고작 몇 년만에 배운 것으로 정장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쟁이로서 허락되지 않았다."

- 장성필 명인(
名人) -


나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에 태어났다.

생활이 어려워 어린나이에 20리를 걸어야 갈 수 있는 초등학교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그 당시 부모님이 양복기술을 배우면 밥은 굶지 않는다고 말하며 어린 나를 부산시내 한성양복점으로 보냈다.

그때는 싫고 좋고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수업이 시작됐다. 양복점에는 기술자가 세 명 있었고 나는 막내였다.

당시의 교육은 욕설이나 구타는 기본이었고 심부름만 3년을 시켰다. 신입은 제일 먼저 일어나 불을 피웠다.
당시만 해도 다리미를 연탄불에 달구었다. 연탄이 없으면 아무 작업도 할 수 없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즈음에 시작한 일과는 11시가 넘어야 끝이 났다.

한창 클 나이에 잠도 맘껏 푹 못자는 것도 힘들었지만 제일 힘든 것은 사장댁 아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볼 때였다.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나는 사장 아들과 마주칠 때마다 다리미에 데어 흉 투성이인 손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당시 기술을 배우기 위해 좁은 양복 재단실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연탄불을 피우고
밤 11시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잠을 자지 못하며 고된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나는 기술을 배웠다. 


"부산에 내려간지 2년만에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다."

"이 넓고 황량한 세상에 일곱 남매만 남은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형님들도 누님도 계시지만
나도 자리를 잡아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밤잠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막내 동생을 고아원에 보내지 않고
거둬주신 사촌형님께
은혜를 베풀어주신 사촌 형님께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었다."


- 장성필 명인(
名人) -


1980년 드디어 대구 서문시장에서 기성복 하도급 업체를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하도급 업체에 대한 상황은 좋지 않았다.
6~8개월 단위로 끊어주는 어음은 직원 월급조차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은명숙)가 한두 벌을 깁더라도 우리 둘이 직접 해보자는 그녀의 용기에
2000년 지금의 "매니아"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양복 한 벌 가격으로 14만9천원을 받았다.

기성복과 비교해 제품의 질은 유지하되 거품을 뺀 가격으로 차별화를 두고 경쟁하고자 했지만
너무 싼 가격으로 의심의 눈초리만 남긴 채 3년 동안 아파트 한 채를 날렸다.

하지만 점차 옷을 입어본 사람들이 다시 찾아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를 끝까지 믿어주며 함께 한 아내의 내조는 탁월했다.

그녀는
"고객이 매니아를 찾아서 갈 때까지 절대로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반드시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편안하게 모시겠다."를 끝까지 실천했다.

그렇게 단골이 늘어나면서 우리의 명성이 알려졌다.

"매니아"는 절대 처음의 마음자세를 변하지 않을 것이다.

첫 고객이 결국 단골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모실 것이다.



"장인으로서 평생 지녀야 할 미덕인 성실성"

"나는 그것을 부모님께 물려받았다."

"마을에서 우리집 땔감 더미의 높이가 제일 높았다. 그만큼 부지런하셨던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평생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이 아닌 행동으로 가르치셨다."

"가끔 게을러지려고 할 때마다
일거리를 찾아 쉴 새 없이 움직이시던 어머니의 손과
마을에서 제일 키가 높았던 아버지의 땔감 더미를 생각한다. "

- 장성필 명인(名人) -